아쿠아맨 Aquaman (2018) by 멧가비


혈육간 왕위쟁탈 클리셰는 이미 경쟁사(?)인 마블의 영화 시리즈에서만 두 번을 써먹었다. 최종전에서 아서가 옴을 지상으로 끌어내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챙기는 건 동사의 [맨 오브 스틸]을 떠오르게도 한다. 엄마가 나타나서 두 아들의 갈등을 무마시키는 부분은 좀 멀지만 [가면가이더 키바]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진부한데도 어쩐지 재미있는 건, 같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다른 무드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장르"라는 건 진부함이 쌓여서 형성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장르 작품이 장르적으로 진부한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진부함 위에 새로운 "취향"을 얹어서, 같지만 다르게 포장한 걸 내놓는 게 장르물이 해야할 일이고 그걸 잘 했기 때문에 여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화들이 호평 속에 시리즈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는 그걸 해낸다. 쓸 데 없는 똥폼 잡다가 침몰한 DC 유니버스의 다른 영화들의 전철을 밟지 않고, [원더우먼]이 그랬듯이 기본에 충실하면서 관객이 좋아할 것들을 차곡차곡 보여준다. 감독이 영향 받았다 공언한 레퍼런스들으로도 이미 영화가 얼마나 클리셰 덩어리일지 짐작하고도 남지만, 그것들이 적소에 배치되어 어떤 것들끼리 시너지를 내는지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장르라는 것이 어떻게 소비되는지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만든 결과물이다.



그 동안 DC 유니버스 영화들에 가해졌던, "제발 마블 좀 보고 배워라"라는 훈수가 [원더우먼]에 이어 조금씩 먹히고 있는 인상. 특히나 이번에는 마블의 장기인 '타 장르의 인용'을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한 점이 눈에 띈다. [로맨싱 스톤] 등의 보난자 어드벤처 영화라든가 스페이스 오페라, 심해 호러, 코즈믹 호러 등 먹힐 만한 건 닥치는 대로 갖다 붙였다. 덕분에 전체의 구성은 다소 덜컹거리지만 부분 부분의 단순한 재미가 뛰어나고 싫증날 때 쯤 다른 장르로 넘어가는 템포도 좋다.


또한 DC 유니버스 영화 사상 처음으로 현실 사회를 반영한 메시지가 단편적으로나마 삽입된 점 또한 이 영화가 그간의 DC 영화들보다는 MCU에 더 가까이 접근했다는 느낌을 주는 요소다. 메시지라는 게 반드시 필요한 요소는 아니지만, 이야기의 방향성을 잡아주는 지표 역할 쯤은 해 줄 수 있다. 시리즈 사상 처음으로 언더독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은 점 또한 돋보인다. 덕분에 우주에서 온 신이나 몰락한 귀족의 도련님, 신들이 사는 섬에서 온 이방인 등 기존 DC 캐릭터들에게서 풍기던 어딘가 모르게 거만하고 나이브한 태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본작의 주인공인 아서 커리 역시 왕족이기는 하지만, 왕가를 배경으로 하는 멜로 드라마에서 '서자'라는 위치는 사실상 계급 갈등의 밑바닥에 있는 포지션이다. 덕분에 압도적인 무력이나 흔해 빠진 정통성만 내세우기 보다는 "듣는 능력"으로 대통합을 이뤄내는 결말에도 자연스럽게 도달한다. 결투로 왕권을 차지하는 플롯으로 [블랙 팬서]가 재미본지 얼마 안 됐는데, 그에 따르는 진부함을 교묘히 잘 피해간다.


캐스팅 좋다. 배우들이 가진 기존 이미지를 배반하듯이 깨는 캐릭터 배분과 성격 묘사 등이 센스 있다. 꼴뵈기 싫을 정도로 현실 정치인을 닮은 기회주의자가 돌프 룬드그렌일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다. 윌렘 데포가 끝내 비열한 웃음을 보이지 않아서 놀랐다. 세상 우악스럽게 생긴 제이슨 모모아가 알고 보면 섬세한 태도에 꽤 지적이기까지 한 외강내유 마초를 잘 소화한다. 반면 니콜 키드먼은 바로 작년에 나온 [앤트맨과 와스프]에서의 미셸 파이퍼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냥 그렇고, 앰버 허드의 '메라'는... 영화 캐스팅에 대해서 배우 외모 따지는 건 질색인데, 메라를 보고 있으면 생각이 달라진다. 안 그래도 예쁜 배우를 극한으로 치장해서 스크린에 세워 놓으니 그 자체로 그림이다. 공교롭게도 [스몰빌]에서 메라 역을 맡았던 엘리나 사틴을 봤을 때도 딱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기존의 수 많은 슈퍼히어로 상대역들처럼 얼굴값만 하는 피랍 전문 캐릭터이거나 트로피 걸프렌드 따위에 머무르지 않는 점 훌륭하다. 비교하자면 '바보 온달' 설화의 평강 공주 포지션인데 싸움도 잘 한다. 주인공에 영감을 주는 킹 메이커이면서 그 자신도 어엿한 전사인 게 멋지다. 칼리시!


액션은 클라이막스의 대규모 전투보다는 시칠리에서의 중간보스전이 훨씬 좋다. 블랙 맨타는 없던 CG 울렁증도 생길 지경인 이 영화에서 드물게 진짜 질감이 느껴지는 악당이라 좋다. 특촬물 같다는 평이 있었나보던데, 특촬물 그 맛에 보는 거 맞다. 투박하더라도 실재감을 선호하는 쪽이 있는 거지.


좋은 점이 꽤 많은데 유머 감각은 여전히 DC 영화답게 영 꽝이다. 인물들의 감정선 변화나 태도 전환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러나 황금기 '소년점프'의 만화들처럼, 세세한 텍스트의 공백을 호쾌한 활극성으로 무마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정면돌파다. 못하겠는건 포기하고 대신 작풍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패기. 유머는 꽝이다.


또 다른 단점은 시각효과 과잉. [그래비티] 때의 피로감이 생각난다. 제발 익숙한 중력이 작용하는 곳으로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간절하게 든다. 물맨이 주인공이니 물 속이 주 배경인 건 맞는데, 피로감을 차치하고서라도 물 밖에서의 시퀀스들이 더 재밌는 게 사실이니까. 이른바 "머니 쇼트"라고 부르는, 돈으로 색칠한 장면이 지나치게 많다. 질린다.


이런 느낌이다



단점은 아니지만 사소하게 아쉬운 점. 코믹스 속 메라의 '암살자' 설정을 배제했더라. [구운몽]의 심요연이나 '스타워즈 레전드'의 마라 제이드처럼, 주인공 죽이러 왔다가 감화되는 섹시한 암살자 설정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데 이걸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볼 기회를 놓쳐서 섭섭하다.






연출 제임스 완
각본 제임스 완, 윌 빌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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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개그. 아서는 아들 데리고 해적질이나 하는 남자를 조소한 후 다음 장면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훈훈한 술자리를 갖는다. 그런데 그 훈훈한 아버지 역할을 맡은 테무에라 모리슨은 정작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아들 데리고 악당 끄나풀이나 하는 남자였지. 이게 자꾸 떠올라서 피식피식 웃게 된다.


덧글

  • IOTA옹 2019/03/16 11:35 #

    아 장고펫이 주인공 아빠로 나오나 보네요.
    아직 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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