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마블 Captain Marvel (2019) by 멧가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안에서 슈퍼히어로의 기원을 다룬 영화만 해도 이 영화 전에 벌써 대여섯 편이 넘어간다. 그에 대한 관객의 염증을 감지한 마블은 이쯤에서 변화를 준다. 플롯을 어찌할 순 없으니 구성을 바꾼 것. 기억을 잃은 특수요원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며 겸사겸사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음모를 파헤치기도 하는 에스피오나지 스릴러 영화처럼 보인다. 영리하달 수 밖에. 본작의 중심 소재인 '스크럴'은 원래 냉전시대에 만들어진 소재이기도 하니, 궁합 좋은 변주이기도 하다.


문제는, [윈터 솔저]처럼 앗쌀하게 본격 스릴러 노선을 타는 것도 아니고, 반전은 너무 알기 쉬워서 반전 역할도 못 한다는 것. 이미 세계관 내에서 나쁜 놈들로 물심양면 활약하신 크리족 놈들이 주인공 옆에 아군이랍시고 서 있으면, 저 조직에 문제가 있어서 깨판이 나겠구나, 하는 걸 모를 수가 있나. 눈치가 더럽게 없거나 전작들에 대한 정보를 숙지하지 않은 채로 봐야 더 재미있는 영화라니 세상에. 시도에 비해 성과가 약하다.


냉전시대 적국을 은유하던 스크럴과 달리 영화에서는 제3세계 난민에 대한 메타포로 재해석 한 점 좋다. 페미니즘과 더불어 또 다른 현대 사회 이슈를 반영하는 센스는 나무랄 수 없다. 다만 그 때문에 코믹스에서 스크럴이 등장하는 이벤트에 팽배하던 피아불명의 긴장감이 사라진다. 국내에도 정발된 [시크릿 인베이전] 이벤트는, 비록 당시 팬덤에서 욕은 많이 먹었을지언정 나는 마치 마블 코믹스판 [바디 스내처] 같은 느낌이 들어서 참 좋아했었다. [시빌 워]의 성공 이후, 막연하게 언젠간 [시크릿 인베이전]도 실사화되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이렇게 김이 새 버렸다. 일장일단.


영화의 특히 좋은 점은 이 길고 긴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사무엘 잭슨이 영화 내내 주역으로 참여하는 점이다. 작중 배경마따나 딱 90년대 형사 버디물 같은 분위기가 제법 나는데, 사무엘 잭슨의 [다이 하드 3]이나 [원초적 무기] 등이 떠올라 괜히 감상에 젖게 된다. 그런데 얼굴을 40대로 리터칭했어도 액션에서는 나이를 속일 수가 없으신 것 같아 슬프다.


페미니즘은 딱 절반 정도가 와닿는다. 여성 뿐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관객에게 호소력 있는 요소들을 갖춘 것이 사실이다. 캐럴 댄버스는 그의 서사로서 혹은 직접 대사를 통해서, 어떤 형태로든 제한 당하는 약자들을 고무시킬 진취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너에게 증명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대사는 특별히 인상적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페미니즘을 어필한 다른 영화들처럼 그걸 다루는 방식은 멋 없다. 난 여전히 [킬 빌]이 가장 세련된 방식의 여성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기깔나는 검객은 전부 다 여자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성별을 굳이 강조하지 않거든. 스크린 안에 서 있는 게 남자인지 여자인지 따지지 않고 그저 인물 자체에 매료되는 것. 그게 세련된 방식인데 이 영화는 그 정도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증명하지 않겠다면서 다른 한 쪽으로는 자꾸 뭔가를 호소하는 게 보인단 말이다.


제작 태도 면에서 여성 주인공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러워 한다는 인상도 있다. 마치 이 영화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기대치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캐럴 댄버스라는 캐릭터는 처음부터 다 잘 하고 완벽한데 단지 세상이 잘못됐다는 식이다. 이건 지금까지의 마블이 하던 방식이 아니다. 적어도 자기 이름을 제목으로 내건 캐릭터들은 어떤 형태로든 나약하거나 한심한 부분을 하나 씩 가지고 있다. 심지어 시리즈 전체의 주인공 격인 토니 스타크는 거의 매 출연마다 그런 식. 외인구단이랄까 반쪽짜리 영웅이랄까, 강건한 육체 밑에서 너무나 쉽게 드러나는 약점들이 캐릭터의 매력이요, 이를 극복하는 성장 스토리야말로 이 세계관의 10년 역사를 만든 원동력 중 하나가 아닌가. 롤 플레잉 게임으로 비유하건대, [인피니티 워]에서의 토르가 열심히 키워서 최종 보스전 까지 온 만렙 캐릭터라면, 이 영화의 댄버스는 중간보스도 만나기 전에 치트키부터 쓴 거다. 무소불위의 강한 무력을 가진 주인공일수록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약점을 극복하면서 성장하는 모습이 서사를 완성시키는 건데, 우리의 마블 대장님은 너무 투명 드래곤이시다. 여성 캐릭터가 영웅이 됨에 있어서 남자들한테 그 어떤 것도 증명할 필요는 없지만, 영웅 서사의 주인공으로서는 관객에게 증명해야할 게 있는 법이다. 이 영화는 그 가장 중요한 부분을 약식으로 처리한다. 그래서 영화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미덕들에도 불구하고 정작 주인공은 뻣뻣하고 재미없다.


개봉 전에 뜨겁다 못해 지저분하기 까지 했던 배우 외모 논란은 잠재우고도 충분했으리라 본다. 주인공 배우의 성별이 여자이다 뿐이지, 섹스 어필은 커녕 "관습적인 여성성"을 써먹는 영화가 전혀 아니잖나. 소위 주연 배우의 캐스팅에 있어서 "예쁘장함"을 일순위로 고려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아니 난 애초에 [커뮤니티]에서 처음 봤을 때 부터 브리 라슨 배우 마스크 좋다고 생각했는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대해서 초기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가해지는 비판 중 하나는 '악당 캐릭터의 텍스트적 빈약함'이다. 나는 처음으로 이에 동의한다. 다른 세세한 비판이야 다른 사람들도 다 지적하는 부분이니 차치하고서라도, 댄버스를 굳이 세뇌해서 자기들 편으로 만들다 못해 성실하게 훈련까지 시키는 참말로 성실한 뻘짓. 쇼와 가면라이더 악당들은 꼭 정신력 강한 마초들만 납치해서 개조했다가 세뇌 실패하고 뒷통수 쳐맞는데 딱 그 거랑 똑같다. 언젠가 자기들 손에서 터질 폭탄일 게 뻔한데 손에 쥐고 있는 거지. 이게 이 영화의 가장 멍청한 점 중 하나다.


멍청한 점 또 하나는 씨발 이거 아마 욕 많이 먹었을텐데, 카리스마갑 애꾸눈 선장 퓨리의 비밀이 겨우 그거라 이거지. 페미니즘, 난민 사태 이슈 까진 좋았는데 전세계 애묘인들의 애환을 우주적 스케일로 확장해가면서 너스레 떨 필요 있었냐. 결과적으로 [윈터 솔저]에 까지 똥물 튀긴 거 아냐.




총평 - 기대 안 한 부분이 좋아서 놀랐는데, 걱정 안 했던 부분에서 망친다.






연출 애너 보든
각본 애너 보든, 라이언 플렉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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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몰래츠]를 인용한 부분에서 두 가지 의미로 뭉클했다.


- 드라마 [커뮤니티] 출신 배우들이 루소 형제 연줄로 MCU에 소소하게 출연한 사례들이 있는데, 그 [커뮤니티]에서 단 2회 밖에 나오지 않은 배우가 가장 성공해서 까메오가 아닌 주인공을 맡아 버렸으니, 세상 참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지.




- 안대 차는 쪽 눈 위에 반창고 붙여서 일관성 유지하는 디테일 좋다. 딱 거기 까지만 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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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우르 2019/03/15 20:49 #

    스탠 리에 대한 헌사. 개인적으론 처음부터 좋았던 브리 라슨의 마스크.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본 콜슨. 무난하게 들어간 메시지들 다 좋았단 말이죠.. 그런데 진짜 퓨리 눈만큼은 정말 어이 없었습니다. 꼭 그래야했냐 정말...
  • 멧가비 2019/03/15 22:25 #

    그게 재밌다고 생각한 걸까요 그 사람들은..
  • 동굴아저씨 2019/03/16 08:54 #

    저도 배우 생긴건 별로 관심 없었는데 SNS에서 사고를 두번이나 치는걸 보고 볼까?했던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극장가서 내 돈과 시간을 할애해 가면서 봐야될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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