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그빌 Dogville (2003) by 멧가비


"은총"이라는 이름의 이방인은 개들의 마을에 흘러들어와, 개들을 일시적으로 구원하고 그 스스로 금단의 열매가 되어 개들을 매료했으며, 개들로 하여금 타락을 앞에 놓아 선택하도록 시험에 빠뜨렸고, 마지막에는 개들을 불태움으로써 타락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을 단죄하며 다시 아버지 곁으로 떠난다. 교화를 가장해 타락을 독려한 위선자의 피는 직접 손에 묻히고,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개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


생소하게도 연극 무대처럼 꾸며진 영화 속 마을의 미장센은 관객으로 하여금 상충되는 두 가지 감각을 동시에 체험케 만드는 장치다. 목불인견의 추잡한 인간군상의 타락, 소름끼치는 집단적 폭력을 목격함에 있어서 관객은 연극적 공간이 주는 거리감에 힘입어 모든 폭력의 순간에서 조금은 안전하게 물러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미장센을 도식화해버리자 관객의 눈에는 인물들의 얼굴, 말과 행동이 오히려 더 오롯이 포착된다. 즉 관객은 제3자라는 감각에 의해 정서적으로 보호받지만 오히려 동시에 벽 없는 무대에 같이 선 방관자이기 때문에 그 모든 악행을 필터 없이 날 것으로 목격하게 된다. 이 모순적인 두 가지, 안전한 거리감과 외면할 수 없는 집중감 중 관객은 취사선택해야 하는 책임을 안게 된다.


고백컨대, 그레이스의 고행이 가시화될 수록, 발정난 남자들이 더럽게 접촉하고 질투에 빠진 여자들이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할 때서야 비로소 나는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것은 인간군상의 폭력성이라는 것이,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라고 눙치고 넘어갈 수 있는 무언가의 선을 넘어, 단죄받아 마땅한 명실상부 "악"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저들에게 남은 것은 처벌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다.


그러나 그 카타르시스의 흥분이 가시고 나면 영화의 현실 외면이 떠올라 공허하다. 영화에 의하면 그들에게 내려온 신은 그렇게 고난의 면류관을 쓴 채로 타락한 자들을 벌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도그빌의 주민같은 자들이 그레이스의 이름을 빌어 실제 자신의 추함을 외면한 채 세상을 누린다. 특히 톰 주니어 같은 인간은 그레이스의 대리자를 참칭하며 부당한 부와 명예를 축적하는 사회 기득권층이 되기도 한다. 기호화된 메타포 역할극에서 현실 종교의 추잡함 까지 고발하라 요구할 수는 없지만, 종교의 엄숙한 상징성만을 쏙 빼먹는 것 같아 얄미운 것 또한 사실이다.





연출 각본 라스 폰 트리에